돌멩이레터 29호에 퍼즈플리즈 편이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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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레터 29호 | 퍼즈플리즈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
물결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레터를 씁니다. 연휴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는 어쩌다 보니 내내 집에만 있었어요. 푹 쉬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집이라는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스스로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물결님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집을 좋아해요. 종일 시선 뺏길 일 많은 바깥세상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모든 시청각 자극이 절반 이상 줄어들어요.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는 익숙한 공간은 보이는 걸 보는 게 아닌 보고 싶은 걸 볼 시간을 넉넉히 내어줍니다. 그럼 그때부턴 드는 생각이 아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기분이에요. 자유롭고 안전해요.
오늘 물결님에게 들려드릴 브랜드 '퍼즈플리즈(pauseplease)'는 집을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요. 이름은 잠옷이지만 잘 때 입는 옷이란 뜻보다 '온전히 나를 위한 옷'이란 설명이 더 잘 어울리는 옷을 만듭니다. 개인적으로 브랜드도 제품도 참 자유롭고 편안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제가 생각하는 '집' 그체인 느낌이랄까요. 물결님에겐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해요.
- 초록 드림
Pause Please
퍼즈플리즈
멈추니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
이름에서부터 느낄 수 있겠지만, 퍼즈플리즈는 경력 10년의 패션디자이너 아내와 경력 6년 그래픽디자이너 남편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 태어난 브랜드에요. 각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표란 직함을 가지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부부에게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한 곳이었어요. 동시에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계속 커져갔죠. 어디까지나 회사일, 그러니까 남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성과에 목을 매게 되고, 집에 돌아와 잠만 자고 나가니 집이 회사를 위한 건지 회사가 집을 위한 건지 혼란스러운 날들이 이어졌어요.
PP(PausePlease) 부부는 온전히 나를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다니던 직장을 함께 그만둬요. 재택근무를 하며 공동으로 육아를 하고 집에서 건강한 요리를 해 먹는, 느리더라도 가치 있는 멈춤을 실현하기로 한 거에요. 퇴사 이후 부부는 24시간 붙어 대화하고 이해하며 때론 다투기도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집에 있는 시간도 확연히 늘어났어요. 자연스럽게 집에서 입을 옷이 제일 먼저 필요해졌고요. 평소 잠도 많고 잠옷도 좋아하던 PP 아내에게서 출발한 생각은 ‘집옷 같은 잠옷을 만들자’는 데 도착했어요. 두 사람의 능력을 잘 살리면서 둘 다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요. 마침 코로나19로 비수기를 맞은 여러 업체에서 두 분을 반겨주셨어요. 시장 질서가 바뀌는 타이밍이니 작은 브랜드에겐 기회이기도 했죠.
그렇게 많은 것들이 멈췄던 2021년, 퍼즈플리즈라는 작은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브랜드를 지탱하는 기록
패션디자이너와 그래픽디자이너가 만드는 잠옷 브랜드. 두 사람의 전문 분야인데다가 퍼즈플리즈라는 멋진 이름까지 나왔으니 어쩐지 시작이 순조로운 느낌이에요. PP부부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업계획서부터 샘플 제작, 업체 미팅, 자사몰 운영, 배송 박스 디자인까지… 회사에서는 여러 팀이 각각 맡아서 하던 일을 이제 두 사람이 모두 해야 했어요. 온통 처음 해보는 것투성이였죠. PP 부부는 이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당황하기보다 이 모든 과정을 기록했어요. 한 번에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 대신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 브랜딩은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과정이에요. 쉽게 말하면, 브랜딩은 그저 '한 사람을 솔직하게 브랜드로 치환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야 정체성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대부분 저지르는 실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점은 없애고 장점을 부각하자!’ 우리 브랜드가 단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어려운 걸까요, 아니면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걸까요. 단점을 없애다 보면 모든 브랜드가 다 똑같아집니다.”
- PP 시즌 2 / EP.04
PP 부부의 솔직한 기록은 비단 창업가로서 겪는 현실적인 사업 이야기뿐만 아니라 브랜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나 그때그때 드는 고민, 후회, 자잘한 실수까지도 포함해요. 그리고 이 기록을 고객에게 한정짓지 않고 똑같이 브랜드 런칭을 하려는 창업가분들, 어느 특정 분야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경계 위의 아티스트 등 다양한 사람들과 나눕니다. PP 남편은 인스타그램에 부부의 고민과 방황, 좌충우돌을 그래픽이나 짧은 영상으로 작업해 꾸준히 올려요. PP 아내는 매주 뉴스레터를 발행하며 텍스트로 그 내용을 전하고요.
뉴스레터는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흥미로운 건 '어바웃(about) 탭'을 클릭하면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 신념 이런 소개말 대신 67개의 뉴스레터 에피소드가 저를 반겨요. 이미지나 영상이 짧고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면, 이 67편이나 되는 에피소드는 몇 시간에 걸쳐 저를 시나브로 퍼즈플리즈의 세계로 끌어들였어요.
배송이 누락된 어느 늦은 밤, 상자 하나를 싣고 부랴부랴 배송을 다녀온 이야기. 서로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 매번 충돌하고 또 맞춰가는 부부의 이야기.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시작했는데 결국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해 속상했던 이야기. PP 부부만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이야기 등… 이 이야기들을 모두 읽고 나니 퍼즈플리즈만의 자연스럽고 단순한, 담백하고 산뜻한 무엇보다 자유로운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물결님도 시간이 난다면 한 편씩 찬찬히 읽어보시길 바라요.
PP 부부에게 다들 뉴스레터를 왜 쓰냐고 묻곤 한대요. 그렇다면 답은 이렇습니다. 처음엔 퍼즈플리즈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소통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기록'하기 위해서라고요. 한 주 동안 있었던 일, 다음 한 주에 일어날 일, 겪고 있는 문제와 고민을 기록해 가면서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반추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살피는 거에요. 서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던 이 기록은 이제 브랜드의 코어가 되어 퍼즈플리즈를 지탱해요. 대기업이나 완벽함만을 추구하는 브랜드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아요. 오직 스몰 브랜드 그리고 퍼즈플리즈였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싶어요.
경계 없는 자유로움
1. 매일 덮는 이불 같은 잠옷
우선 소재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어요. 잠옷은 흔히 레이온이나 실크 혼방 소재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소재는 사실 땀도 잘 안 통하고 세탁이나 보관이 어려워 막상 사고 나면 손이 잘 가지 않아요. 그래서 땀 흡수율이 높고 이불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이 나는 100% 순면, 바이오 워싱 코튼 소재로 잠옷을 만들었어요. 구김이 가더라도 자연스럽고 세탁도 쉬워요.
2. 오래 몸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옷
소재를 선택한 뒤 본격적인 디자인 드로잉을 하면서부터는 핏과 기장감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불편한 실루엣은 과감히 버리고 활동하기에 편하도록 만들었어요. 디자인 요소이자 실용성을 갖춘 주머니도 추가했고요. 마감은 일반적인 봉제 방법이 아닌 통솔 봉제를 택했어요. 주로 명품 브랜드나 고가의 의류에 쓰이는 봉제 방법인데요, 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피부에 닿을 때 불편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접합 부분이 떨어지지 않아요. 덕분에 자다가 뒤척이며 옷이 틀어지더라도 찢어질 일이 없죠. 리오더를 반복하며 고객의 피드백을 반영해 하의 라벨을 제거하는 등 조금씩 더 나은 옷을 만들고 있어요.
퍼즈플리즈는 지금까지 총 3개 시즌을 선보였어요. ‘집'에서 시작된 브랜드인 만큼 첫 번째 시즌(Home — Inspiration)은 집과 영감에 관해 다뤘어요. 일상적인 공간에서 오는 즐거움과 영감을 사진과 영상, 제품의 컬러에 섬세히 녹여냈답니다. 두 번째 시즌(Ant Garden)에서는 소소한 행복을 찾으러 집을 나서는 이야기를 담았고요. 먼 여행보다는 집 앞 공원이나 카페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었다고 해요. 세 번째 시즌(No Context)은 말 그대로 맥락을 없앴던 시즌이에요. 맥락을 부여하느라 잠옷을 되레 어렵게 만드는 대신 단순하게 접근해보기로 한 거에요. 퍼즈플리즈가 나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보다 고객의 선택을 믿고 비워내는 시도를 했어요.
퍼즈플리즈의 제품과 비슷한 듯 다른 세 시즌을 둘러보며 이 모든 걸 관통하는 요소를 찾을 수 있었어요. 바로 '경계 없는 자유로움'이에요. 물결님도 퍼즈플리즈 뉴스레터를 쭉 읽어보면 느낄 수 있을 텐데요. 퍼즈플리즈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일하지만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는 않아요. 우리 웹사이트는 쇼핑몰이어야 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어야 해 - 이런 식으로 경계선을 긋고 그 안에 스스로 가두는 일을 하지 않아요. 제품도 그렇죠. 잠옷 같기도 홈웨어 같기도, 심지어 외출복 같기도 해요. 이렇게 경계가 없다 보니 그만큼 자유로워요.
작은 브랜드는 대형 온라인 편집숍에 노출되는 게 중요하다고 해요. 그래서 꾸준히 신상을 내놓아야 하고요. 하지만 PP부부가 퇴사한 이유는 기계처럼 시즌을 뽑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래서 언제까지 신상을 내야한다는 마감선이 없죠. 퍼즈플리즈는 좋은 제품을 만들고 꾸준히 사랑받는 브랜드, 돈에 관한 생각보다 좋은 브랜드 경험을 주는 브랜드로 남고 싶다고 말해요. 시작(start)도 중지(stop)도 아닌 그사이, 일시 정지(pause) 상태에서 지금도 퍼즈플리즈는 자유롭게 브랜드 외연을 넓혀가고 있답니다.
여러 빛깔이 공존하는 초저녁 하늘처럼
일반적으로 브랜드가 걷는 길은 이래요. 유명 온라인 편집숍에 입점해 인지도를 키워나가다 보면 백화점 팝업 스토어 기회가 생겨요. 이후에 유명 브랜드와 콜라보를 하거나 전시, 음악 등 브랜드 영역을 넓혀나갑니다. 퍼즈플리즈는 어떻게 했냐고요? 예상하셨겠지만 퍼즈플리즈는 거꾸로 갑니다. 처음부터 유쾌한, 무엇보다 PP 부부가 즐거운 마케팅을 하고 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 편집숍이 아닌 퍼즈플리즈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찾아요.
아주 초창기부터 뮤지컬 배우 겸 기획자인 지인과 함께 음악을 만들고 'FLOW'라는 퍼포먼스를 했어요.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퍼즈플리즈를 홍보하고 동시에 코로나19로 인해 설 무대가 사라진 배우들에게는 이름을 알릴 기회를 줘요. 예술과 브랜드가 상생하는 거에요. 실제로 퍼즈플리즈 사운드 작업을 담당했던 분께서는 이후 다른 곳에서 작업 제안을 받기도 했대요.
퍼즈플리즈가 먼저 솔직하고 가감 없이 말을 걸어온 덕분일까요. 2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선뜻 퍼즈플리즈와 어떤 형태로든 흥미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며 먼저 손을 내밀어온 분들이 많다고 해요. 퍼즈플리즈는 이런 분들을 '피피크루(PP Crew)'라고 불러요. 경계 없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피피크루라는 이름으로 재밌는 일을 해요. 집에서 나는 일상적인 소리를 주제로 '사운드 오브 홈(Sound of Home)'이라는 작은 오프라인 전시를 열기도 했어요.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던져야 하는 질문이 있어요. 바로 '퍼즈플리즈라는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는 한 단어로 무엇인가?'란 질문이에요. 맞아요. 이런 활동들은 퍼즈플리즈를 알리고 브랜드를 확장해 나가는 마케팅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결국 퍼즈플리즈의 정체성이 되어 돌아오는 신기한 힘을 가져요. 퍼즈플리즈의 기록이 그랬듯이 피피크루와 함께 성장해나가는 일은 PP 부부로 하여금 꾸준히 '퍼즈플리즈'란 어떤 브랜드인가를 돌아보게 해요. 그리고 다시 나아갈 자신감과 확신을 줍니다. 지금은 잠옷을 만들고 있지만 담요를 시작으로 집에서 필요한 다양한 제품을 만들 예정이에요. 전시나 공연, 언젠간 짧은 독립영화를 한 편 만들지도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퍼즈플리즈는 어떤 제품이 되었든, 어떤 모습이 되었든 낮과 밤 사이 여러 빛깔이 경계 없이 공존하는 초저녁 하늘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브랜드로 물결님에게 남을 거에요.
Article by 에디터 초록
해당 콘텐츠의 저작권은 돌멩이레터 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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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Pause Please
돌멩이레터 29호에 퍼즈플리즈 편이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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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레터를 씁니다. 연휴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는 어쩌다 보니 내내 집에만 있었어요. 푹 쉬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집이라는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스스로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물결님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집을 좋아해요. 종일 시선 뺏길 일 많은 바깥세상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모든 시청각 자극이 절반 이상 줄어들어요.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는 익숙한 공간은 보이는 걸 보는 게 아닌 보고 싶은 걸 볼 시간을 넉넉히 내어줍니다. 그럼 그때부턴 드는 생각이 아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기분이에요. 자유롭고 안전해요.
오늘 물결님에게 들려드릴 브랜드 '퍼즈플리즈(pauseplease)'는 집을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요. 이름은 잠옷이지만 잘 때 입는 옷이란 뜻보다 '온전히 나를 위한 옷'이란 설명이 더 잘 어울리는 옷을 만듭니다. 개인적으로 브랜드도 제품도 참 자유롭고 편안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제가 생각하는 '집' 그체인 느낌이랄까요. 물결님에겐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해요.
- 초록 드림
Pause Please
퍼즈플리즈
멈추니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
이름에서부터 느낄 수 있겠지만, 퍼즈플리즈는 경력 10년의 패션디자이너 아내와 경력 6년 그래픽디자이너 남편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 태어난 브랜드에요. 각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표란 직함을 가지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부부에게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한 곳이었어요. 동시에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계속 커져갔죠. 어디까지나 회사일, 그러니까 남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성과에 목을 매게 되고, 집에 돌아와 잠만 자고 나가니 집이 회사를 위한 건지 회사가 집을 위한 건지 혼란스러운 날들이 이어졌어요.
PP(PausePlease) 부부는 온전히 나를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다니던 직장을 함께 그만둬요. 재택근무를 하며 공동으로 육아를 하고 집에서 건강한 요리를 해 먹는, 느리더라도 가치 있는 멈춤을 실현하기로 한 거에요. 퇴사 이후 부부는 24시간 붙어 대화하고 이해하며 때론 다투기도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집에 있는 시간도 확연히 늘어났어요. 자연스럽게 집에서 입을 옷이 제일 먼저 필요해졌고요. 평소 잠도 많고 잠옷도 좋아하던 PP 아내에게서 출발한 생각은 ‘집옷 같은 잠옷을 만들자’는 데 도착했어요. 두 사람의 능력을 잘 살리면서 둘 다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요. 마침 코로나19로 비수기를 맞은 여러 업체에서 두 분을 반겨주셨어요. 시장 질서가 바뀌는 타이밍이니 작은 브랜드에겐 기회이기도 했죠.
그렇게 많은 것들이 멈췄던 2021년, 퍼즈플리즈라는 작은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브랜드를 지탱하는 기록
패션디자이너와 그래픽디자이너가 만드는 잠옷 브랜드. 두 사람의 전문 분야인데다가 퍼즈플리즈라는 멋진 이름까지 나왔으니 어쩐지 시작이 순조로운 느낌이에요. PP부부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업계획서부터 샘플 제작, 업체 미팅, 자사몰 운영, 배송 박스 디자인까지… 회사에서는 여러 팀이 각각 맡아서 하던 일을 이제 두 사람이 모두 해야 했어요. 온통 처음 해보는 것투성이였죠. PP 부부는 이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당황하기보다 이 모든 과정을 기록했어요. 한 번에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 대신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 브랜딩은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과정이에요. 쉽게 말하면, 브랜딩은 그저 '한 사람을 솔직하게 브랜드로 치환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야 정체성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대부분 저지르는 실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점은 없애고 장점을 부각하자!’ 우리 브랜드가 단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어려운 걸까요, 아니면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걸까요. 단점을 없애다 보면 모든 브랜드가 다 똑같아집니다.”
- PP 시즌 2 / EP.04
PP 부부의 솔직한 기록은 비단 창업가로서 겪는 현실적인 사업 이야기뿐만 아니라 브랜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나 그때그때 드는 고민, 후회, 자잘한 실수까지도 포함해요. 그리고 이 기록을 고객에게 한정짓지 않고 똑같이 브랜드 런칭을 하려는 창업가분들, 어느 특정 분야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경계 위의 아티스트 등 다양한 사람들과 나눕니다. PP 남편은 인스타그램에 부부의 고민과 방황, 좌충우돌을 그래픽이나 짧은 영상으로 작업해 꾸준히 올려요. PP 아내는 매주 뉴스레터를 발행하며 텍스트로 그 내용을 전하고요.
뉴스레터는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흥미로운 건 '어바웃(about) 탭'을 클릭하면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 신념 이런 소개말 대신 67개의 뉴스레터 에피소드가 저를 반겨요. 이미지나 영상이 짧고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면, 이 67편이나 되는 에피소드는 몇 시간에 걸쳐 저를 시나브로 퍼즈플리즈의 세계로 끌어들였어요.
배송이 누락된 어느 늦은 밤, 상자 하나를 싣고 부랴부랴 배송을 다녀온 이야기. 서로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 매번 충돌하고 또 맞춰가는 부부의 이야기.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시작했는데 결국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해 속상했던 이야기. PP 부부만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이야기 등… 이 이야기들을 모두 읽고 나니 퍼즈플리즈만의 자연스럽고 단순한, 담백하고 산뜻한 무엇보다 자유로운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물결님도 시간이 난다면 한 편씩 찬찬히 읽어보시길 바라요.
PP 부부에게 다들 뉴스레터를 왜 쓰냐고 묻곤 한대요. 그렇다면 답은 이렇습니다. 처음엔 퍼즈플리즈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소통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기록'하기 위해서라고요. 한 주 동안 있었던 일, 다음 한 주에 일어날 일, 겪고 있는 문제와 고민을 기록해 가면서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반추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살피는 거에요. 서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던 이 기록은 이제 브랜드의 코어가 되어 퍼즈플리즈를 지탱해요. 대기업이나 완벽함만을 추구하는 브랜드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아요. 오직 스몰 브랜드 그리고 퍼즈플리즈였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싶어요.
경계 없는 자유로움
1. 매일 덮는 이불 같은 잠옷
우선 소재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어요. 잠옷은 흔히 레이온이나 실크 혼방 소재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소재는 사실 땀도 잘 안 통하고 세탁이나 보관이 어려워 막상 사고 나면 손이 잘 가지 않아요. 그래서 땀 흡수율이 높고 이불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이 나는 100% 순면, 바이오 워싱 코튼 소재로 잠옷을 만들었어요. 구김이 가더라도 자연스럽고 세탁도 쉬워요.
2. 오래 몸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옷
소재를 선택한 뒤 본격적인 디자인 드로잉을 하면서부터는 핏과 기장감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불편한 실루엣은 과감히 버리고 활동하기에 편하도록 만들었어요. 디자인 요소이자 실용성을 갖춘 주머니도 추가했고요. 마감은 일반적인 봉제 방법이 아닌 통솔 봉제를 택했어요. 주로 명품 브랜드나 고가의 의류에 쓰이는 봉제 방법인데요, 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피부에 닿을 때 불편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접합 부분이 떨어지지 않아요. 덕분에 자다가 뒤척이며 옷이 틀어지더라도 찢어질 일이 없죠. 리오더를 반복하며 고객의 피드백을 반영해 하의 라벨을 제거하는 등 조금씩 더 나은 옷을 만들고 있어요.
퍼즈플리즈는 지금까지 총 3개 시즌을 선보였어요. ‘집'에서 시작된 브랜드인 만큼 첫 번째 시즌(Home — Inspiration)은 집과 영감에 관해 다뤘어요. 일상적인 공간에서 오는 즐거움과 영감을 사진과 영상, 제품의 컬러에 섬세히 녹여냈답니다. 두 번째 시즌(Ant Garden)에서는 소소한 행복을 찾으러 집을 나서는 이야기를 담았고요. 먼 여행보다는 집 앞 공원이나 카페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었다고 해요. 세 번째 시즌(No Context)은 말 그대로 맥락을 없앴던 시즌이에요. 맥락을 부여하느라 잠옷을 되레 어렵게 만드는 대신 단순하게 접근해보기로 한 거에요. 퍼즈플리즈가 나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보다 고객의 선택을 믿고 비워내는 시도를 했어요.
퍼즈플리즈의 제품과 비슷한 듯 다른 세 시즌을 둘러보며 이 모든 걸 관통하는 요소를 찾을 수 있었어요. 바로 '경계 없는 자유로움'이에요. 물결님도 퍼즈플리즈 뉴스레터를 쭉 읽어보면 느낄 수 있을 텐데요. 퍼즈플리즈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일하지만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는 않아요. 우리 웹사이트는 쇼핑몰이어야 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어야 해 - 이런 식으로 경계선을 긋고 그 안에 스스로 가두는 일을 하지 않아요. 제품도 그렇죠. 잠옷 같기도 홈웨어 같기도, 심지어 외출복 같기도 해요. 이렇게 경계가 없다 보니 그만큼 자유로워요.
작은 브랜드는 대형 온라인 편집숍에 노출되는 게 중요하다고 해요. 그래서 꾸준히 신상을 내놓아야 하고요. 하지만 PP부부가 퇴사한 이유는 기계처럼 시즌을 뽑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래서 언제까지 신상을 내야한다는 마감선이 없죠. 퍼즈플리즈는 좋은 제품을 만들고 꾸준히 사랑받는 브랜드, 돈에 관한 생각보다 좋은 브랜드 경험을 주는 브랜드로 남고 싶다고 말해요. 시작(start)도 중지(stop)도 아닌 그사이, 일시 정지(pause) 상태에서 지금도 퍼즈플리즈는 자유롭게 브랜드 외연을 넓혀가고 있답니다.
여러 빛깔이 공존하는 초저녁 하늘처럼
일반적으로 브랜드가 걷는 길은 이래요. 유명 온라인 편집숍에 입점해 인지도를 키워나가다 보면 백화점 팝업 스토어 기회가 생겨요. 이후에 유명 브랜드와 콜라보를 하거나 전시, 음악 등 브랜드 영역을 넓혀나갑니다. 퍼즈플리즈는 어떻게 했냐고요? 예상하셨겠지만 퍼즈플리즈는 거꾸로 갑니다. 처음부터 유쾌한, 무엇보다 PP 부부가 즐거운 마케팅을 하고 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 편집숍이 아닌 퍼즈플리즈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찾아요.
아주 초창기부터 뮤지컬 배우 겸 기획자인 지인과 함께 음악을 만들고 'FLOW'라는 퍼포먼스를 했어요.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퍼즈플리즈를 홍보하고 동시에 코로나19로 인해 설 무대가 사라진 배우들에게는 이름을 알릴 기회를 줘요. 예술과 브랜드가 상생하는 거에요. 실제로 퍼즈플리즈 사운드 작업을 담당했던 분께서는 이후 다른 곳에서 작업 제안을 받기도 했대요.
퍼즈플리즈가 먼저 솔직하고 가감 없이 말을 걸어온 덕분일까요. 2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선뜻 퍼즈플리즈와 어떤 형태로든 흥미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며 먼저 손을 내밀어온 분들이 많다고 해요. 퍼즈플리즈는 이런 분들을 '피피크루(PP Crew)'라고 불러요. 경계 없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피피크루라는 이름으로 재밌는 일을 해요. 집에서 나는 일상적인 소리를 주제로 '사운드 오브 홈(Sound of Home)'이라는 작은 오프라인 전시를 열기도 했어요.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던져야 하는 질문이 있어요. 바로 '퍼즈플리즈라는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는 한 단어로 무엇인가?'란 질문이에요. 맞아요. 이런 활동들은 퍼즈플리즈를 알리고 브랜드를 확장해 나가는 마케팅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결국 퍼즈플리즈의 정체성이 되어 돌아오는 신기한 힘을 가져요. 퍼즈플리즈의 기록이 그랬듯이 피피크루와 함께 성장해나가는 일은 PP 부부로 하여금 꾸준히 '퍼즈플리즈'란 어떤 브랜드인가를 돌아보게 해요. 그리고 다시 나아갈 자신감과 확신을 줍니다. 지금은 잠옷을 만들고 있지만 담요를 시작으로 집에서 필요한 다양한 제품을 만들 예정이에요. 전시나 공연, 언젠간 짧은 독립영화를 한 편 만들지도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퍼즈플리즈는 어떤 제품이 되었든, 어떤 모습이 되었든 낮과 밤 사이 여러 빛깔이 경계 없이 공존하는 초저녁 하늘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브랜드로 물결님에게 남을 거에요.
Article by 에디터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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